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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계획
대상텍스트 김구 저, 도진순 주해, 『백범일지』, 돌베게, 2002
수업방식 (1) 강의 - 강좌의 의미와 대상 텍스트, 인물에 대한 소개
(2) 토론 - 수강생들이 직접 읽고 각자 읽은 가장 인상깊은 내용을 소개함. 이후 그 내용을 중심으로 토론을 진행.
(3) 총괄 - 몇가지 문제를 중심으로 텍스트의 내용과 소감을 정리
* 사전에 텍스트를 공지하고 자신이 소개할 부분, 소감을 준비해 오도록 유도할 것.
수업구성 (1) 수업의 의미와 텍스트에 대한 소개 : 2시간
(2) 준비한 내용 발표와 토론 : 2시간
(3) 발표의 정리와 내용의 총괄 : 2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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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연세인문학과 한국 근현대사를 읽는 의미

인문학은 인간의 삶에 대한 성찰의 학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보다 나은 삶, 인간다운 삶을 위해 우리들의 지나온 삶, 현재의 삶을 곱씹고 들어가 봄으로써 새로운 지혜를 얻으려 하는 노력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렇다면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요? 수많은 선현들의 통찰과 지혜로부터 실마리를 찾는 것이 아마도 가장 빠른 길이겠지요. 그러나 그와 더불어 우리들이 발딛고 있는 이 자리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이며, 우리의 삶과 정신이 어떤 과정을 거쳐 여기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살펴보는 것 역시 중요하리라 생각합니다. 역사에 대한 인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지혜도 우리가 발딛고 있는 이곳, 이곳의 처지가 확인되지 않은 상태라면 붙잡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런 점을 염두에 두고 우리의 역사, 그 중에서도 지금과 가까이 있는 ‘근현대사’를 살펴보면 참으로 우울하고 속상합니다. 최근 몇십년만 놓고 보면 높은 경제성장과 풍요를 이뤘다고도 하지만, 지난 100년의 역사는 식민지, 분단, 전쟁으로 점철된 비극의 역사였습니다. 또 그 역사의 후유증은 현재진행형이기도 합니다. 분단 이후 남북의 정치, 군사적 대립은 때때로 우리 모두를 불안하게 하고, 식민지, 분단, 냉전체제 속에 구축된 억압적 정치체제와 해소되지 않은 사회갈등, 사회구성원 사이의 맹렬한 경쟁상황은 우리의 미래를 쉽게 낙관할 수만은 없게 합니다. 그래서 때론 우리의 과거, 역사, 경험 속에서 과연 배울만한 것이 있는지, 되돌아 볼 필요가 있는가라는 의문이 제기 되기도 합니다. 과거와 현재는 다르며, 잊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 이런 질문도 가능할리라 생각합니다. 그것이 어떻든 우리 자신의 과거를 부정하고, 우리의 현재를 설명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드리워진 그림자가 짙고 길더라도 그것을 정확히 응시할 때, 우리의 가능성과 미래에 대해서도 냉정하고 지혜롭게 바라볼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또한 편한 역사가 아니었기에 그 역사 속에서 고민하고 좌절하고 실천하고자 했던 수많은 과거의 경험들은 진실로 이곳에서 사는 사람들이 어떻게 고민하고 생각해야 하는지를 보여주지 않을런지요.
연세대학교의 인문학의 전통은 식민지시기 연희전문 문과가 시작된 이래 바로 그런 고민에 발딛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연세 인문학은 인류의 세계사적 진보와 보편적 가치를 앞장서서 받아들이면서도, 그것을 맹종하는 것이 아닌 우리 역사와 학문사상의 지반을 확인하는 가운데 주체적으로 수용하여, 고금과 동서의 지혜가 화충하는 우리의 길을 추구한 역사였습니다. 제국주의 근대의 폭력이 2차 세계대전으로 달려가고, 식민통치가 영원할 것처럼 생각되었던 1930년대 실학을 연구하고, 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되돌아 보고자 했던 국학의 전통이 바로 연세대학교 인문학의 시작이었습니다. 또 그 되돌아봄을 자신의 역사와 문화를 특권화하는 것으로 귀결시키지 않고, 그 안에서 인류가 지향해야 될 보편적 가치의 조선적 가능성을 찾으려 했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 우리가 같이 읽고 얘기해 보려는 내용은 바로 그런 경험입니다. 어쩌면 평온해 보이는 우리의 일상과 현실은 조금만 그 껍질을 들춰보면 많은 혼란과 불안한 미래를 얘기하고 있습니다. 쉽게 해결되지 않을 것 같은 많은 정치, 사회적 문제들을 비롯하여 졸업후 진로, 취업, 사회생활과 같은 아주 구체적이며 직접적인 문제까지 많은 어려움들이 놓여 있습니다. 그것은 대부분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헤쳐 나가기 어려운, 사회와 국가가 같이 고민해야 할 문제들입니다. 그러나 그 국가와 사회의 노력이라는 것들 역시 그 구성원 각자, 각자의 문제를 직시하려는 노력, 어려움에 좌절하지 않고 지혜롭게 풀어나가려는 노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할 수 있는 사람, 곧 책임감 있는 시민이 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지키고, 긴호흡으로 삶과 사회의 미래를 내다보는 능력 여하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힘들었던 우리의 역사에서 역설적으로 그 점을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혹하고 힘든 삶 속에서 어떻게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고, 더불어 사는 삶의 가치를 잃지 않으려 했는지, 때론 잊기도 하지만 그 역사 속에서 꾸어온 고귀한 꿈은 어떤 것이었는지를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시대에 따라 많은 것들이 변했지만, 역사를 헤쳐나가는 어떤 힘과 성찰 속에서 미래를 준비하는 지혜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 이제 그런 고민을 염두에 두고 앞으로 우리가 앞으로 살펴볼 책은 김구의 󰡔백범일지󰡕입니다.

2. 백범과 백범일지에 대하여

백범 김구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독립운동가입니다. 아마 한국의 독립운동가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이라고도 할 수 있겠죠..
그런데 백범 김구에 대한 여러분의 이미지는 어떻습니까? 아주 대단한 그리고 범접할 수 없는 강렬한 독립운동가의 이미지가 아닌지요.. 보통사람과 다른 신념에 가득찬 강렬한 독립운동가, 어떤 숭고한 위인의 모습이 백범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아닌가 싶습니다.
백범에게는 실제로 그런 면이 있지요.. 일단 백범하면 생각나는 것은 한인애국단의 단장입니다. 한인애국단 하면 다소 낯설 수 있고, 국사교과서에서 한 번쯤 외어 본 단체라는 생각이 들겠지만, 이봉창과 윤봉길하면 얼른 기억할 수 있을 겁니다. 1932년 일본천황에게 폭탄을 던진 이봉창과 홍구공원에 모인 일본 고위장성, 관료에게 도시락 폭탄을 던진 윤봉길이 소속되어 있던 독립운동 단체가 한인애국단입니다. 김구는 바로 그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이봉창, 윤봉길 두 의사의 의거를 계획하였습니다. 이 사건은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1919년 수립되었지만 내분과 노선투쟁으로 존재의 의미조차도 잃어가던 임시정부가 자신의 존재감을 되찾고 1930년대 중국 내 민족운동을 주도할 수 있게 한 획기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아마 이 사건을 조직하고, 이후 강력한 무장투쟁 노선으로 임정을 이끌어간 김구가 아니었다면 임시정부는 존립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어쨌든 폭탄을 던지는 독립운동의 지도자, 바로 그것이 우리에게 각인된 김구의 이미지입니다.
또 하나 김구 하면 생각나는 모습은 38선을 베고 죽겠다며 끝까지 남북분단정부 수립을 반대하고 분단이 사실상 확정된 1948년에도 남북협상회의에 참여했다, 결국 암살당한 민족주의자 김구입니다. 해방 후 통일국가 수립에 실패하는데 김구가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극심한 좌우대립 속에 남북한 분단정부 수립이 기정사실화된 그 순간까지도 모든 것을 바쳐 막으려 한 김구의 모습은 숭고한 민족지사의 모습을 생각하게 합니다. 어떤 숭고함과 견결함, 그리고 다소는 완고한 민족주의자의 모습이 김구에 대한 우리의 대체적 이미지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물론 김구는 그러한 위인입니다. 그러나 이런 질문도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런지요? 과연 김구는 태어날 때부터 견결한 민족주의자였을까? 도대체 그는 어떻게 그런 독립운동가가 되었을까? 그리고 오로지 조국의 독립만을 생각하며 그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 터미네이터 같은 김구에게 가족들은 어떤 의미였을까? 평생 일본이라는 강력한 적과 목숨을 내놓고 싸워온 투사인 그의 꿈은 무엇이었을까? 아니 꿈이라는게 있었을까? 요약하자면 그도 사람일텐데, 사람으로서의 그는 어떤 모습이며, 또 어떻게 범인의 길과 다른 길을 과감하게 살 수 있었을까와 같은 인간적 질문 말입니다.
󰡔백범일지󰡕는 독립운동가이자 한 인간이었던 김구가 담담하게 써내려간 그에 대한 대답입니다. 어찌하여 진실로 평범한 사람이 되고 싶어했고, 또 평범한 사람임을 자부했던 자신이 민족독립의 험란한 길에 인생을 걸게 되었는지, 그 민족운동의 와중에 겪어야 했던 참혹한 고통과 번민, 그리고 선택의 순간들은 어떠했는지, 매순간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와 좌절을 어떻게 극복했는지, 신산한 자신의 삶을 지켜내며, 삶의 마지막까지 꾼 꿈은 무엇이었는지를 적고 있습니다.
그가 왜 이런 기록을 남겼을까요? 애초에 백범이 백범일지를 쓴 이유는 자신이 죽더라도 남아 있는 사람들, 특히 자식들에게 자신이 누구였으며, 왜 그들 곁에 없는지를 설명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여기서 잠깐 백범일지의 구성을 설명하자면 상편과 하편, 그리고 마지막에 추가된 글, 합하여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 중 상편은 1928년에서 1929년 사이에 쓰여졌습니다. 여러분에게 나눠준 약력을 참조하면 알 수 있듯이 그 시기는 김구가 1920년대 중반 이래 무기력해진 임정의 국무령이 되어, 침체된 독립운동을 타개하기 위해 한인애국단을 조직하던 그 때입니다. 김구는 독립운동에 활기를 불어 넣기 위해서는 임정이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목숨을 던져 적을 죽이는 테러운동을 감행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돈도 조직도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한인애국단은 그래서 만든 단체였습니다. 그러나 그 길을 선택한 그의 마음은 실로 참담했습니다. 그렇게 조선의 젊은이들을 죽음의 길로 안내해 놓고 자신이 살기를 바라는 것은 염치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신도 조만간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 생각하며, 남게 될 아들 인과 신에게 자신이 살아온 길의 기록을 남겨 놓은 것이 백범일지의 상편입니다.
하편은 그렇게 죽음을 각오했던 시기가 지나, 중국에서의 독립운동이 일정한 궤도에 오른 1942년, 중국전선에서 일본군과 맞서 싸우며 상권을 쓴 이후의 일들을 적고 있습니다. 모진 탄압과 인간으로서 감내하기 힘들었던 불행들 예컨대, 가족의 죽음, 동료의 비참한 죽음, 배신, 배신에 대한 처단, 실패와 좌절 등 1930년대 이후 중국에서의 독립운동세력이 겪어야 했던 참담한 상황과 극복의 과정을 적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은 1947년 백범일지 출간되는 시점에서 겪은 해방 전후의 상황과 자신이 평생을 거쳐 꿈꿔온 소망을 고백하는 내용입니다. 잠재적 유서로 시작되어 독립운동사가 되고, 후손에게 바라는 미래의 소망으로 마무리 되는 담담한 기록이 백범일지라고 하겠습니다.
백범일지를 쓴 이유에서 보이듯이 이 책은 자신을 자랑하기 위해 쓴 글이 아닙니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자신의 잘못, 시행착오, 겪어야 했던 고통, 번민, 주위에 대한 감사가 주 내용입니다. 또 많은 사람들이 상찬하는 독립운동의 과정에 대해서도 그 길을 자랑하기 보다는 그 길에 따른 희생과 어쩔 수 없는 선택의 고민들을 적고 있습니다. 한 명의 평범한 범부, 말 그대로 백범의 인간으로서 독립운동의 길을 걷게 된 한 인간의 어떤 운명과 고뇌의 선택, 그러함에도 내린 결단, 자신과 같은 운명에 있던 사람들에 대한 애도, 그리고 그 죽음과 희생 끝에 기원하는 소망을 기록한 것이 백범일지입니다. 그러니까 백범일지는 어떤 위대한 운동가의 자기회고가 아닌 불완전한 인간이자 망국의 보통사람이었던 김구가 겪었던 운명과 그에 대한 싸움의 기록이며, 그와 비슷한 운명 속에서 혹은 싸우거나, 혹은 죽거나 비범해진 수많은 보통 조선인들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의 질문으로 돌아가자면 독립운동가 이전에 평범한 조선인이었으나 망국의 백성이 된 사람들이 무엇을 경험하였고, 무엇을 희생했는지, 그리고 그들을 지탱한 희망과 존엄의 가치는 무엇이었는지를 전해주는 글입니다.
이 시간에 여러분과 함께 읽으려 하는 부분도 그것입니다. 독립운동은 하고 싶어서 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식민지가 아니었다면 밭 갈고 아이를 키우며 행복하게 살고 싶었던, 범부의 꿈을 꾸었던 사람들입니다. 바로 백범은 그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보통사람의 꿈은 역사의 운명 속에 사라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그 운명에 맞서 싸우려 하였고, 그런 사람들은 더욱 가혹한 희생을 겪어야 했습니다. 미치거나 자신을 버리거나 증오만이 남을 수 있는 그런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백범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는 역사를 애도하고, 피 묻은 손을 응시하지만 포기하지 않습니다. 참혹한 죽음과 목숨을 건 공격, 배신의 난무와 인간성 자체에 대한 회의를 경험하지만, 증오와 복수로 미래를 얘기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질문하는 것입니다. 과연 19세기 말 20세기 전반 제국주의 침략과 냉전 속에 식민지와 분단을 겪으며 살아야 했던, 그러면서도 자신은 평범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어떤 한국인은 어떻게 역사로부터 자신을 지켜냈는지, 그리고 그러한 역사 속에서 어떤 인간의 꿈을 꾸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또 다른 위기 속에 살고 있고, 아마도 더 세찬 역사의 격랑이 우리 앞에 다가올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어떻게 이 역사 속에서 자신을 지켜내고, 아름다운 꿈을 꿀 수 있을까요.. 우리가 20세기 한국인 김구에게 물어볼 질문입니다.


3. 읽을 내용

백범일지 전체를 읽도록 권유하되, 마지막 「나의 소원」 부분은 반드시 읽도록 할 것.


4. 생각해 볼 문제 (필요할 경우 활용. 학생들이 제기한 문제를 중심으로 수업을 진행할 예정)

1) 김구는 독립운동의 과정에서 같은 조선인들의 배신에 죽을 고비를 넘기도 하고, 뜻처럼 운동이 전개되지 않고 분열할 때, 많은 실망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현실에 절망하거나 조선민족에 대한 신뢰를 거두기보다는 오히려 새롭게 자신을 성찰합니다. 그는 어떻게 그 상황을 극복하였으며, 그때 마다 그가 얻은 깨달음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2) 김구는 많은 시행착오를 겪기도 했고, 스스로 결점이 많은 평범한 인간이라고 생각합니다. 독립운동의 지도적 위치에 올라서도 스스로를 평범한 사람이라고 했던 이유는 무엇이며, 그러한 평범함에 대한 자부는 그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요?

3) 김구는 사상이나 이데올로기는 민족의 영속성 앞에 스쳐가는 바람이라고 얘기하며, 민족의 절대성을 주장합니다. 과연 그에게 왜 민족은 절대적인 존재이며, 영속적인 존재일까요? 지금 우리에게도 민족은 절대적인 것일까요?

4) 김구는 우리 민족은 이제 증오와 적대감을 버리고 문화와 자유의 나라를 꿈꿔야 한다고 얘기합니다. 그는 오랜 고통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왜 증오를 버려야 한다고 얘기했을까요? 그리고 그가 꿈꾸는 문화와 자유의 나라는 어떤 나라이며, 지금 우리의 현실 속에서는 어떤 의미로 이해해야 할까요?

[ 참고자료 : 백범 김구 연보 ]

1876(1세) 음력 7월 11일 (양 8. 29.) 안동 김씨 김자점(金自點)의 방계(傍系)후손으로, 황해도 해주 백운방 텃골에서 아버지 김순영(金淳永)과 어머니 곽낙원(郭樂園)의 외아들로 태어남. 아명(兒名)은 창암(昌巖), 2월 ‘한일수호조규’조인

1883~86(8~11세) 아버지는 불평이 많아 양반을 구타, 도존위(都尊位)에 천거되었다가 3년이 못되어 면직

1887(12세) 집안어른이 갓을 쓰지 못하게 된 사연을 듣고 양반이 되기 위해 공부하기로 결심

1888~89(13~14세) 4월에 할아버지 김만묵(金萬黙)별세, 아버지가 갑자기 뇌졸중으로 전신불수, 호전되어 반신불수. 백범은 큰어머니 댁, 장연 재종조 누이 댁 등을 전전하다

1892(17세) 임진년(壬辰年) 경과(慶科)에 응시하여 낙방

1893년(18세) 정초에 포동 오응선(吳膺善)을 찾아가 동학 입도

1894년(19세) 가을에 해월 최시형에게 연비 명단 보고차 보은에 가서 접주 첩지를 받음

1896년(21세) 양력(이하 양력) 2월 다시 중국으로 떠났으나, 안주에서 단발령의 정지와 삼남의병 소식을 듣고 돌아오기로 결심. 3월 9일 치하포에서 일본인 쓰치다(土田讓亮)를 죽임. 5월 해주옥에 투옥. 7월 인천감옥으로 이송됨. 옥중에서 장티푸스에 걸림

1898년(23세) 양력 3월 백범 탈옥

1900년(25세) 2월에 김두래(金斗來)로 변명하고 강화 김주경을 찾아감. 고능선 선생 찾아 뵙고 논쟁, 세대가 다른 것을 느낌

1902년(27세) 1월에 여옥(如玉)과 맞선을 보고 약혼함. 우종서의 권유로 탈상 후 기독교 믿기로 결심.

1903년(28세) 1월 약혼녀 여옥이 병사함

1904년(29세) 12월 최준례(崔遵禮)와 결혼

1905년(30세) 12월 신교육을 실시하기로 하고 고향에 돌아와 교육사업에 매진함.

1907년(32세) 1월 첫딸 사망

1909년(34세) 해서교육총회 학무총감으로 황해도 각 군을 순회하며 환등회, 강연회를 열어 계몽운동을 전개함.

1911년(36세)1월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어 김홍량, 도인권 등과 함께 경성으로 압송, 총감부 임시 유치장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함.

1915년(40세) 둘째 딸 화경 죽음

1916년(41세) 셋째 딸 은경(恩慶)태어남

1917년(42세) 셋째 딸 은경 죽음

1918년(43세) 11월에 아들 인(仁)출생

1919년(44세) 3.1 운동으로 안악에서도 만세운동, 어머님, 환갑잔치를 사양, 3월 29일 백범, 안악에서 출발, 평양, 신의주, 안동을 거쳐 상해로 망명, 9월 상해 임시정부의 경무국장(警務局長)이 됨

1924년(49세) 1월 아내 최준례, 상해 홍구 폐병원에서 사망

1926년(51세) 백범, 국무령에 선출됨

1928년(53세) 3월 『백범일지』 상권 집필시작, 임시정부의 활동 침체로 독립운동가들이 임정을 떠나자, 백범은 미주 교포들에게 편지보내기 정책을 실시함

1929년(54세) 5월 1년 2개월 만에 『백범일지』 상권 탈고

1931년(56세)일본 요인 암살을 목적으로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을 창단

1932년(57세) 1월 8일 이봉창 의사 일황 히로히토(裕仁)에게 수류탄을 던졌으나 실패.. 4월 29일 윤봉길 의사 상해 홍구공원에서 일황 생일 경축식장에 폭탄을 던져 시라카와(白川)대장 등을 즉사케 함

1935년(60세) 임정의 김구시대 개막. 11월 이동녕, 이시영, 조완구, 엄항섭, 안공근 등과 함께 임시정부를 옹호하기 위하여 한국국민당을 조직

1938년(63세) 백범, 이운환의 저격으로 의식 불명, 한달간 입원, 현익철(玄益哲)은 절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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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64세) 4월 어머니 곽낙원(81세) 인후염으로 돌아가시다

1940년(65세) 5월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한국국민당을 통합하여 한국독립당 결성
10월 임시정부 헌법 개정, 백범, 주석으로 선출됨

1941년(66세) 『백범일지』, 하권 집필을 시작

1942년(67세) 7월 광복군, 중국 각지에서 연합군과 공동작전을 전개하기 시작

1943년(68세) 8월 임정의 헌법 개정한 문제로 임정내 좌파와 갈등. 백범, 주석직 사직을 발표하였다가 갈등 해소로 복귀

1945년(70세) 1월 일본군에 끌려간 학병 50여 명, 탈출하여 임시정부로 찾아옴. 11월 미군정의 반대로 정부 자격으로 귀국 좌절. 임시정부 국무의원, 두 차례로 나뉘어 귀국.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 반대하여 신탁통치반대총동원위원회를 조직

1947년(72세) 1월 반탁독립투쟁위원회를 조직하고 제2차 반탁운동 전개, 12월 국사원에서 『백범일지』출간

1948년(73세) 1월 UN 한국위원단에 통일정부 수립을 요구하는 6개항의 의견서를 보냄. 3월 김규식, 김창숙, 조소앙, 조성환, 조완구, 홍명희와 7인 공동성명을 발표하여 남한총선거 불참  표명, 4월에 북행, 남북연서 회의에 참여

1949년(74세) 6월 26일 낮 12시 36분경, 경교장에서 육군소위 안두희의 총에 맞아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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