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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고전 문학이란?

 

문학 작품을 고전(classic)이게 만드는 특징은 무엇인가? 고전이라 부르는 문학 작품은 모두 위대한 문학”(great literature)이다. 고전 문학이 다루고 있는 내용의 높이와 깊이와 넓이가 엄청나다. 위대하다. 공간적으로 무한하고 시간적으로 영원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의 영혼을 높이 끌어올린다. 그곳에서 우리는 우리 영혼의 실체에 품었던 의문에 대한 목마름을 해소한다. 그 이유는 문학의 형식이라 할 문학 고유의 특성인 작품의 리듬과 호흡을 통하여 혼란스러워 무질서했던 우리 생명의 본질이 회복되기 때문이다. 그 우주적 리듬이라는 우주적 질서는 차별화된 반복성으로 역동적이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존재성의 우주적 질서를 회복시켜준다. 그러한 우주적 질서를 보여주는 위대한 작품으로 고전의 대열에 들어갈 수 있는 틀을 마련해주는 주는 문학 장르가 서사시이다.

 

서사시 장르에 속하는 작품의 내용은 크게 두 가지 주제를 다룬다. 국가의 탄생을 다루거나 아니면, 세계의 창조와 질서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대표적인 서사시 작품으로 세 작품이 있다. 호머(Homer: 기원전 10세기)일리아드(Iliad)오디세이(Odyssey)가 있고, 단테(Dante: 1265-1321)신곡(Divine Comedy)과 밀턴(Milton: 1608-74)실낙원(Paradise Lost)이 있다. 호머의 두 작품의 내용은 문자 이전 시대의 그리스 세계를 다루고 있다. 독자는 두 작품이 보여주고 있는 그리스 세계의 역사적, 사회적, 철학적, 신학적 텍스트를 읽어낼 수 있고, 무엇보다도, 구어문화가 문자문화로 바뀌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이야기 형식의 변화를 읽어낼 수 있다. 달리 이야기하여, 호머의 두 작품은 말 이야기가 글 이야기로 전환되는 전범(classic)을 보여준다. 그리고 밀턴의 실낙원(Paradise Lost)은 신과 세상 그리고 인간과의 관계가 16세기 종교개혁과 그 이후의 프로테스탄트 세계에서 어떻게 이해될 수 있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단테의 신곡은 중세 기독교의 종교적인 알레고리 틀 안에 당대의 정치 담론의 울림을 더하여, 매우 독특한 시적 상상력으로 인간 영혼의 깊이와 높이 그리고 넓이를 그려내어 인간을 우주적인 인간으로 격상시켜 놓았다. 신곡에서 인간은 하나의 우주적인 존재로 우주의 역동적인 조화와 균형과 질서의 운동에 참여하고 있다. 우주의 리듬에 참여하고 있는 인간의 모습들이 역동적으로 그려져 있다. 그 작품에서 인간은 현세의 소우주이고 또한 내세의 대우주이다. 신곡에서 우리는 두 우주, 세속의 노래와 하나님 세계의 노래를 듣는다. 무엇보다 신곡은 인간의 육체와 정신이 기독교 역사에서 어떻게 역동적인 삶의 리듬을 창출하는 지를 탐구하는 중세의 지성사이다.

 

 

II. , 단테 신곡지옥편을 읽는가?

성공을 원하는 사람들은 모두 단테 신곡지옥편을 읽어라!”

 

 

지옥편 열다섯 번째 마당(canto)의 내용은 지옥의 아홉 둥근 구덩이들 가운데 일곱 번째에 있는 구덩이로, 다시 이 일곱 번째 구덩이 안에 있는 세 번째 자리에서 형벌을 받고 있는 비정상성애자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중세시대에는 흥미롭게도 남을 가르치는 직업에 있는 지성인들이 전통적으로 남색이거나 동성애자들로 생각되었다. 젊은이들과 많이 접촉하다보니 상대적으로 가르치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동성애 경험이 많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죄지을 기회가 많으니 죄의 유혹도 많았다고 할 수 있다. 동성애는 보통 은밀하게 이루어져 일반인들은 알 수가 없었다. 특히나 동성애가 특권층에서 이루어지면 더욱 더 비밀에 가려질 기회가 많다. 중세에는 말할 수 있는 권력을 지닌 자만이 자유롭게 말할 수 있었다. 말해지지 않으면 그 비밀은 파묻혀져 알 수 없다. 비정상성애자의 죄를 짓더라도 밝혀지지 않으면 알 수 없으니, 그 죄는 죽어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그 때 밝혀질 것이었다. 단테는 신곡에서 밝혀진 이야기보다 밝혀지지 않은 이야기에 더 관심이 많았다. 그는 인간으로서는 밝힐 수 없는 내용들을 하나님의 정의의 입장에서 밝혀내려하였다.

 

단테는 그곳에서 자신을 아들이라 부르는 자신의 옛 스승 브루네토 라티니(Brunetto Latini)를 만나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갖는다. 라티니는 단테에게 세속적인 진리로 세상에서 영예와 명예를 얻을 수 있는 가르침을 준 스승이다. 세속의 스승이다. 라티니는 단테에게 그곳에 있는 사람들을 소개한다. 그곳에는 기원후 6세기경에 살았던 라틴 문법학자 프리시안(Priscian)이 있고, 13세기말까지 볼로냐와 옥스퍼드 법과대학 교수를 지낸 프란체스코 다코르소(Francesco d’Acorso)가 있다. 단테는 이곳에서 교육제도를 비판하고 있다. 그리고 라티니는 단테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플로렌스 사람들은 늘 앞뒤 안 가리기로 유명하다./시기가 많고(invidioso), 자만이 강하고(superbo), 욕심이 많다(avaro)./그러니 너는 그들로부터 물드는 일을 피하여야 한다.)”(67-8) 라티니가 단테에게 플로렌스 사람들을 비난하며 들었던 이들 3 가지 인간의 성품들이 당시 중세에는 악덕들의 전형이었다. 그들 세 가지 죄들은 지옥을 형성하는 근간이 되는 죄들이기도 하다.

 

라티니가 말한 이들 3가지 악덕들은 단테의 지옥의 근간을 이룬다. 지옥의 모든 죄들은 이들 3가지 악덕들에서 분화한 세부 항목들이다. 그러나 이들 3가지 악덕들은 현대에는 3가지 덕목들이 된다. 현대에 와서 중세의 자만심(pride)은 자존감(self-love)으로, 시기심(envy)은 성공(success)으로, 탐욕(avarice)은 열정(passion)으로 옷을 갈아입고, 서점가에 있는 모든 처세술과 관련한 아니면 소위 치료(healing)라는 상담의 허울을 쓴 책들의 주요 덕목으로 적극 추천하고 있는 항목들이다. “성공을 원하는 사람들은 모두 단테 신곡지옥편을 읽어라!” 그리고 지옥에 있는 사람들이 살면서 행한 행동을 그대로 따라하라, 그러면 성공하리라 라고 지옥의 세계를 현실화하는 일에 한 몫하고 있다.

 

중세에는 악덕이었던 품성들이, 어떻게 하여 현대에 와서는 덕목의 품성들이 되어 성공하기위하여 꼭 갖추어야할 자질들이 되었는가? 단테의 지옥에는 우리가 인류 역사에서 배워서 들어 잘 알고 있는 많은 훌륭한(?) 인물들이 모여 형벌을 받고 있다. 중세 사람들은 정의와 도덕의 기준을 하나님에 두고 실제로는 세상의 기준으로 살았다. 그래서 말과 행동이 달랐다. 권력자들과 지성인들, 종교인들이 그랬다. 그래서 세상의 기준으로 성공한 많은 사람들이 지옥에 있었다. 그렇기는 하여도 그들은 이중적인 잣대로 모두 늘 죄의식을 갖고 살았다. 단테가 신곡을 쓸 수 있을 만큼 중세 사람들은 이중적인 삶을 살았다. 그러나 현대는 다르다. 세상의 기준으로 세상을 산다. 무엇보다 중세 사람들과 달리 잣대의 기준이 하나여서 현대인들에게 죄의식이 없다. 후대의 역사가는 말할 것이다, , 그 시대는 그렇게 살았다. 그래서 그 누구도 더 이상 신곡을 쓸 수가 없었다.

 

자본주의 시대는 소비가 삶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소비의 가치가 삶의 가치이다. 그리고 소비는 끊임없이 욕망을 창출한다. 소비는 현재성이다. 미래가 없다. 지금 소비하지 않으면, 미래의 소비는 의미가 없다. 그러하니 소비에 절제가 있을 수 없다. 현재의 삶을 위하여 미래를 담보로 삼을 만큼 현재가 중요하다. 소비의 시대에 절제는 악덕이기 때문이다. 절제하면 우리는 그 만큼 소비의 기회를 잃는다. 욕망의 충족을 잃는다. 파우스트는 24년이란 현재의 삶을 위하여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영원의 삶인 그의 영혼을 팔았다. 현대인들은 파우스트와 같이 살고 있다. 현재가 미래보다 중요하다. 나이가 더 들기 전에 즐겨야 한다. 기회를 놓치지 말고 소비하라고 말한다. 단테의 지옥에 등장하는 플로렌스의 사람들과 같이 우리는 우리의 현재의 삶에 욕심(lust)을 갖고, 자신(pride)을 가지고, “남들과 같이 나도 현재의 삶을 누려야 한다,”(envy)라고 생각한다. 나도 남들과 같이 소비할 권리를 가졌다고 말한다. 과거를 돌아보며 헛되이 살았다고 말하며, 지금이라도 더 소비하며 살겠다고 한다. 과거만 바라보고 미래는 보지 않는다. 늘 과거 이야기만 한다. 그리고 소비하려한다.

 

III. 문학, 무엇을 공부하는가?

 

문학 연구는 문학(Literature)이라는 말 그 자체가 뜻하듯이 글자(라틴어로 litteraletter를 뜻한다)를 연구하는 것이다. 그러니 엄격한 의미에서 문학은 글로 써진 모든 글들을 연구한다. 현재 우리가 의미를 제한하여 사용하고 있는 문학작품연구는 사실상 넓은 의미의 문학연구의 일부이다. 그래서 문학연구는 글로 써진 모든 작품들을 읽어 이해하고 또한 스스로 쓸 수 있는 능력”(literacy)을 키우는 문제를 연구한다. 글 쓰는 일을 제외한다면, 문학연구는 글이 어떻게 써지고, 어떻게 읽혀지고, 어떻게 이해되는가를 연구한다.

 

문학의 연구대상은 크게 3가지이다. 연구대상으로 작가가 있고, 작가가 쓴 텍스트”(Text)가 있고, 그리고 그 텍스트를 읽는 독자가 있다. 중세에는 작가가 그리 중요한 의미를 지니지 않았다. 15세기말 인쇄술과 함께 르네상스가 시작되며(영국은 최초 인쇄출판이 1485년에 이루어졌다), 책에 저자의 이름이 인쇄되며 작가의 의미가 중요하여지기 시작하였다. 그렇기는 하여도 작가가 작품연구에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닌 시기는 19세기 낭만주의이다. 영국 낭만주의 작가 콜리지는 시가 시인이다,”라는 말할 정도로 작품과 작가를 일치하여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19세기이후부터 20세기 초까지 작품보다는 작가 연구가 더 많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와 작가와 작품을 분리하여 생각하였다. 생산자와 상품을 분리하여 생각하는 자본주의적인 사고방식은 문학연구에도 영향을 미쳤다. 연구자들은 문학작품에서 작가와 작품을 분리하여 생각하였다. 그리고 작가 연구보다 작품 연구가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유행이 되었다.

 

텍스트는 크게 3가지를 연구할 수 있다. 텍스트 형성에 직접 관여한 배경(context) 연구가 있고, 그 배경들을 선택하여 사용하도록 만든 주제(message)가 있고, 그리고 그 작품을 문학적(poetic)이도록 이야기를 구성하게 만드는 문학적 규범(literary code)이 있다. 우선 배경을 보자. 배경으로 우리는 작품이 써진 당대의 역사적, 정치적, 철학적, 종교적 배경을 연구할 수 있다. 더구나 이들 배경들은 이야기 형식(narrative)으로 전환되며 작가의 이데올로기가 첨예하게 대두되는 담론형식을 띤다. 그때 문학적 규범이 문제가 된다. 문학의 담론은 다른 여타 글의 담론과 다르게 시적 상상력이 중요한 요소로 자리하고 있다. 다시 말하여 문학의 담론은 사실과 허구의 글쓰기가 교차하는 미묘한 줄타기를 하며 미적경험을 창출해야 한다. 허구이면서 허구가 아닌 진실이어야 하고, 사실이지만 사실이 아닌 허구이어야 하는 독특한 담론이 문학적 담론이다. 그래서 문학에서는 이야기를 짜는 수사가 매우 중요하다. 예를 들어 은유(metaphor)와 제유(synecdoche) 글쓰기가 시의 장르에 우세하고, 환유(metonym) 글쓰기는 소설에, 그리고 아이러니(irony)는 드라마에 우세한 수사로 작용한다. (드라마에서, 관객이 아는 정보를 등장인물은 알지 못하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독자에 대한 연구가 있다. 독자 연구가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중반이후부터이다. 말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듣는 사람도 있어야 하듯이, 글을 쓰는 사람이 있으면 글을 읽는 사람이 있다. 누가 읽는가? 작가는 누가 읽기를 기대하고 글을 쓰는가? 그리고 작가는 글을 통하여 어떻게 독자를 만들어 가고 있는가? 등의 질문들을 할 수 있다. 작품 속에 구체적인 독자를 탄생시킨 결정적인 사건은 인쇄술의 발명이었다. 15세기말 인쇄술이 발견되기 전 책은 모두 손으로 쓴 수서였다. 책을 사서 볼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이 돈 많은 사람이다 보니 책의 내용도 돈 많은 사람의 기호에 맞는 내용으로 짜였다. 그리고 돈 많은 사람은 사적인 독자가 아니라 공적인 독자로 작가의 후원자의 역할을 하였다. 다시 말해 수서의 독자들은 권력에 앞마당에 있는 독자였다.

 

15세기말 인쇄술의 발견과 함께 르네상스가 도래하였다. 그러나 아직은 책을 사서 볼 수 있을 만큼 대중들이 경제적 여유가 있지 않았다. 그리고 책 구매와 관련하여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대중이 글자를 읽을 수 있느냐가 문제였다. 영국 문학을 보면 영국은 르네상스시대에 쏟아져 들어오는 정보를 처리하기위하여 연극을 발전시켰다. 글을 몰라도 눈으로 볼 수 있고 귀로 들어서 알 수 있는 연극을 통하여 철학과 과학 그리고 종교와 문학 등 모든 종합적인 정보들이 청중들에게 전달되었다. 이때부터 문학은 여러 가지 종합적인 정보를 담고 있는 장르로 출발하였다. (르네상스 드라마만큼 다양한 정보들이 많이 들어있는 종합선물 꾸러미 문학 장르가 없다.) 그리고 이때부터 문학연구는 문학이 마치 종합선물세트라고 생각하여 모든 학문분야를 연구하는 텍스트가 되는 듯이 이상한 연구를 하기 시작하였다. 지금도 문학연구에서 철학을 연구하고, 정치학을 연구하고, 법률학을 연구하려한다.

 

르네상스가 지나고 19세기 산업혁명으로 대중이 문학 소비자로 전면에 나설 형편이 될 때까지, 문학은 고급독자들을 겨냥한 시가 주를 이루었다. 작가들도 시를 읽을 수 있는 고급독자들을 대상으로 작품을 썼다. 영국의 낭만주의 작가들은 시의 대중화를 위하여 시의 소재를 민중의 삶에서 찾았지만 그 시를 읽을 수 있는 능력을 갖춘 독자는 대중이 아니었다. 대중은 생활고로 읽을 시간적 여유가 없고, 읽을 수 있는 문학적 능력을 갖추지도 못하였다. 19세기 대중교육을 통하여 글을 읽을 수 있는 대중들이 증가하면서 많은 정보가 들어있는 긴 이야기의 소설장르가 꽃을 피웠다. 그렇게 독자는 각 시대마다 문학 장르를 결정하는 주요한 요인이 되었다. 더구나 작가들은 작품들 속에 그들의 책을 읽을 수 있는 독자들의 정체성을 규정하였다. 어느 작가들은 자신이 정한 독자들과 교류하는 내용을 작품 속에 기록하는 대범함까지 보였다. 작가는 자신의 글을 읽을 수 있는 독자를 규정하지 않고 글을 쓸 수가 없다.

 

문학공부는 글을 읽고 쓰는 것을 가르치는 학문이다. 그러나 글을 읽는다는 것은 글을 쓴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역으로 글을 쓴다는 것은 글을 읽는다는 것과 같다. 예를 들어 우리가 독서를 할 때 우리는 우리의 독서능력으로 글을 읽는다. 어제 읽은 책을 오늘 읽으면서 어제 읽어내지 못하였던 부분을 읽었다면, 책은 어제와 같은 책이지만, 책을 읽는 나는 어제와 다르기 때문이다. 문학의 의미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 독자의 독서능력이 풍부하여지면 따라서 텍스트의 의미도 풍부하여진다. 독자가 텍스트를 읽는다는 것은 독자가 가지고 있는 독서능력으로 또 다른 텍스트를 써내려가고 있다는 말이다. 독서를 마치면, 우리는 우리가 읽은 텍스트 이외에 많은 텍스트를 써서 가지고 있음을 발견하다. 그렇다면 글을 쓴다는 것이 글을 읽는 것과 같다는 말은 무엇인가? 우리가 글을 쓸 때, 우리는 글이라는 문법에서 벗어날 수 없다. 사고와 글이 다른 것이 바로 그런 이유에서이다. 사고는 자유로울 수 있으나, 글은 글이라는 문법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글쓰기가 어렵다고 하는데, 글을 쓰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글로 사고하지 않아서이다. 우리의 사고가 글로 모습을 갖추기 시작할 때 우리는 글쓰기를 할 수 있다. 글을 쓰기 전에 글을 먼저 생각하여야 글을 쓸 수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글을 쓰는 것은 글을 읽는 것과 같다.

 

책을 읽을 때 우리는 가끔 책이 우리를 읽고 있음을 발견한다. 책을 읽지 않았을 때는 몰랐었는데, 책을 읽는 순간 나의 무지가 보이기 시작한다. 책을 읽으며 깨어있는 상태로 의식을 열어놓지 않으면, 우리는 잠과 같은 습관의 노예로 전락하고 만다. 책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습관의 벽을 부수고 우리의 틀 안에서 벗어나라고 한다. 언어학자 소쉬르는 언어의 의미가 차이와 관계 속에서 나온다고 말했다. 다르다는 의식 없이 우리는 습관의 무기력함을 벗어날 수 없다. 단테는 신곡에서 35세가 된 1300년 올바른 길을 잃고 죄의 숲을 방황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어떻게 구원의 순례를 시작할 것인가? 인간은 모두 어디에서 시작할지 몰라 방황한다. 피타고라스는 이 세상이 움직이지 않는 지점이 있다면 그곳에서 세상을 움직이게 하겠다,”고 말했다. 어디에도 중심점은 없고 내가 있는 자리가 중심점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 진리로 만족해 할 사람 또한 아무도 없다. 단테는 신곡에서 35세에 중심점을 찾아 출발하려 한다. 그러자 버질은 네가 있는 자리를 먼저 알라고 한다. 그가 있는 자리는 죄 많은 자리이다. 천국을 가기 전에 먼저 지옥을 가라고 한다. 지옥에서 죄를 인정하고 연옥에서 그 죄를 씻고 그리고 천국에 가라한다. 내가 있는 자리를 알기 위해 우리는 책을 읽는다. 어두운 숲에서 나와 빛으로 인도하는 진리의 길을 가려하면 우리는 먼저 우리 자리에 대한 깨우침이 있어야 한다. 우리의 삶은 매순간이 어둠이다. 우리는 깨어있기 위해 책을 읽는다. 문학은 같은 곳만 바라보는 것을 거부한다.

 

IV. 문학, 왜 공부하는가?

 

 

문학작품은 상상력의 산물이다. 다시 말하여 문학작품의 내용은 사실(fact)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그 내용이 허구(fiction)이다. 그러나 우리가 사실이라고 말하는 그 사실의 내용도 말과 글로 전환되는 순간 사실이라는 허구로 변한다. 글로 써진 사실은 글로 써진 허구화된 사실이다. 언어구사의 범위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사실은 언어의 규칙을 받아 언어로 만들어진 사실이 된다. 문학은 허구화된 사실이고, 사실화된 허구이다. 우리가 글로 써진 모든 사실을 모두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이다. 문학작품이 아니라도 모든 글에는 사실의 곁에 허구가 있고, 허구의 곁에 사실이 있다. 문학작품을 통하여 우리는 문학의 허구에서 사실과 진실을 찾아내는 연구를 한다. 그리고 사실에서 허구를 찾아내는 일도 한다. 감춰진 진실은 사실로 밝혀지기까지 허구이고, 진실이란 허구로 밟혀지기까지만 진실이다. 어떻게 허구가 만들어지는가에 대한 연구 없이 허구화된 사실의 진실을 밝힐 수가 없다.

 

문학에서 가장 문학작품이게 하는 것은 사실과 무관하게 사고(thought) 그 자체의 내용을 기록한 창조적인 사고가 그것이다. 문학 작품 그 자체의 내용이 사고 그 자체인 경우이다. 문학은 작가들이 사고하였던 기억의 창고이다. 실낙원2146-151행에서 타락천사들 가운데 빌리얼(Belial)조차 사고의 위대함을 간직할 수만 있다면 지옥에서의 모든 고통을 감내하겠다고 말한다. - “비록 고통 가득할 지라도, 그 누가 영원히 방황하는 이들 사고들을 잃고, 감각도 없고 동작도 없는 사고의 창조 불가능한 밤의 그 넓은 자궁에 삼켜져 자신을 잃고 말살되고 싶겠는가?” 사고할 수 없다면 우리는 동물과 같다. 빌리얼은 자신의 사고를 귀히 여겨 아무리 큰 고통이라도 자신이 사고할 수 있다는 존재의 귀함을 위로 삼아 하나님이 그에게 가한 고통을 이겨내겠다고 했다. 그렇게, 사고하는 그 자체가 중요하다면, 내가 사고할 수 없는 것들을 문학작품을 통하여 내가 사고할 수 있다면 빌리얼보다 더 큰 것을 얻는 셈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교도를 총체적으로 거부함(Summa contra gentiles)의 제15장에서 다음과 같이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지성만을 믿고 매우 오만하다. 자신에게 진실로 보이는 것은 모두 진실이라 생각하고, 자신에게 거짓으로 보이는 것은 모두 거짓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의 지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아퀴나스의 이 말은 문학을 옹호하는 변명에도 사용할 수 있는 말이다. 문학은 다른 글들과 달리 단언하지 않는다. 더구나 문학작품에 소개되어 있는 사건들의 정황이 사건을 진실이 되게 한다. 문학은 상황에 따른 상대적 진실을 말한다. 문학에서 기술하고 있는 사건의 정황이 달랐다면 그 사건의 진실도 다르게 변형되었을 것이다.

 

문학 작품을 읽는 가장 큰 이유는, 문학 작품이 작가의 불면증 소산으로 기억의 보고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좋은 작품의 기억은 한 개인의 기억이 아니라 무의식이라는 인류의 기억이고 우주의 기억이다. 좋은 문학작품은 우주의 기억을 일깨운다. 문학 작품, 그곳에는 사고의 깊이가 있고, 넓이가 있고, 높이가 있다. 실천적 생각에 중심에 있는 순수 사고에 대해 말해보자.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내가 전에 생각해보지 않았다면, 나는 생각할 수 없다. 우리는 알고 있는 내용을 사고한다. 알지 못하는 것을 사고할 수 없다. 우리가 문학 작품을 읽는다면, 우리는 그 작품이 담고 있는 사고의 기억을 우리의 기억으로 삼을 수 있다. 생각하기 위하여 우리는 책을 읽는다. 책을 읽지 않으면, 우리는 생각할 수도 없다.

 

학문을 제대로 한 사람은 자신이 연구하고 있는 학문과 많이 닮아있다. 자신이 하고 있거나 하고자 하는 학문의 성격이 자신의 모습을 결정한다. 예를 들어 영문학에서 18세기와 19세기문학을 연구한 사람은 사물을 바라보는 태도가 다르다. 계몽주의(Enlightenment)는 말 그대로 처음부터 현재를 무지의 상태로 보고 시작한다. 그리고 무지의 어둠으로부터 깨달음의 빛의 상태로 나가려한다. 계몽주의의 전제는 현재 텍스트의 무지와 오류이다. 처음부터 모른다고 오류라고하고 시작한다. 그리고 자신이 올바르다고 판단하는 그의 관점을 제시한다. 그러나 이곳에 문제가 있다고 낭만주의자는 생각한다. 현재의 텍스트가 무지나 오류가 아니라는 것이 아니라, 계몽주의자가 오류로 지적하여 새롭게 제시한 주장 또한 하나의 관점이란 생각이다. 낭만주의자는 계몽주의자가 제시한 관점에 이의를 제기한다. 낭만주의자가 보기에 계몽주의자의 가장 큰 문제는 그가 판단의 기준으로 삼는 이성(Reason)에 대하여서이다. 이러한 점에서 순수이성을 비판한 칸트가 낭만주의의 담론을 열었다는 주장이 설득력이 있다. 영국낭만주의 시인들 가운데 계몽주의와 낭만주의 경계에서 두 시대를 모두 살며 작품 활동을 한 윌리엄 블레이크가 있다. 그는 그의 시 예루살렘에서 낭만주의의 태도를 분명히 밝히는 유명한 시 구절을 남겼다. - “나는 체제를 창조하여야 한다, 아니면 다른 사람의 체제에 종속되어야 한다./나는 추론(Reason)하거나 비교하지 않을 것이다. 나의 사명은 창조하는 일이다.” 낭만주의자들이 보기에 계몽주의의 이성 또한 상상의 산물이다. 더구나 판단기준으로 삼는 이성이란, 합의로 이루어진 권력의 허구이다. 이성이라는 권력구조에는 억압과 희생, 수용과 배제라는 담론의 역학이 들어설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낭만주의는 권력의 담론에서 벗어난 자유를 외치며, 상상과 감정과 무의식의 꿈과 영원성의 담론을 만들었다. 그러나 글을 쓴다는 것 자체가 억압이다. 언어 세계의 한계성이 그렇고, 문학이란 이야기구조 자체가 그 나름대로 규칙을 지닌 권력구조이다. 억압체제이다.

 

V. “문학,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 단테 신곡지옥

 

 

강의 시간: 24시간(1-4 canto = 3 hours, 5-8 canto = 3, 9-17 canto = 6, 18-30 canto = 9, 31-4 canto = 3)

 

단테 신곡의 구조는 지옥」 「연옥」 「천국3편으로 되어 있다. 지옥은 서곡을 포함하여 34개의 캔토(canto)로 구성되어 있고, 나머지 연옥천국33개의 캔토로, 신곡은 총 100개의 캔토로 구성되어있다. 1개의 캔토는 3행의 시들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캔토를 구성하는 3행의 운율은 테르자 리머(terza rima)라는 고정 운율 형식으로, aba bcb cdc...와 같이 각운이 각각의 행을 서로 엮어가면서 유기적인 운율을 형성하고 있다. 단테는 지옥연옥아이네이드(Aeneid)의 저자 버질(Virgil)로부터 그리고 천국은 베아트리체(Beatrice)로부터 안내를 받는다.

 

단테는 35세 되던 1300년 삶의 방향을 잃고 죄의 숲에 빠져 천국으로 가는 길을 향하여 갈 때 3종류의 짐승들(leopard, lion, she-wolf)을 만나 당황해 할 때, 베아트리체의 부탁으로 단테를 구하러 온 버질은 천국으로 가기 위하여 준비가 필요하다며, 우선 지옥과 연옥을 통과해야 하고, 그 두 곳으로 가는 길을 자신이 인도하겠다고 단테에게 말한다. 이곳에서 우리는 두 알레고리를 마주한다. 하나는 3짐승들이고, 다른 하나는 버질이다. 우선 3짐승들의 알레고리를 보자. 이들 3짐승들은 각각 알레고리의 의미를 갖는데, -늑대는 무절제(incontinence), 사자는 폭력(Violence)을 그리고 표범은 속임수(Fraud)의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이들 3짐승들이 대표하는 죄들은 지옥의 전체 구조의 틀을 형성한다. 지옥은 모두 9개의 원형 계곡으로 되어있고, 이들 계곡을 나누는데 이들 3짐승의 알레고리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다음 도표로 우리는 지옥의 구조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Canto

Circle

죄인 분류

3 짐승의 죄 분류

1-3

0

서시

 

4

1

덕성을 갖춘 이교도들(Limbo)

5

2

정욕(the Carnal)

The Incontinent

(She-Wolf)

6

3

식탐(the Gluttons)

7

4

축재와 낭비(The Hoarders and the Wasters)

5

분노와 실쭉(the Wrathful and the Sullen)

8

5

분노

6

타락천사(The Fallen Angels)

9-11

6

이단자(The Heretics)

 

12

7

원형 둘레 계곡 1: 이웃에게 폭력

The Violent

(Lion)

13

원형 둘레 계곡 2: 자신에게 폭력

14

원형 둘레 계곡 3: 신과 자연과 예술에 폭력

15

자연에 폭력

16

자연과 예술에 폭력

17

예술에 폭력

18

8

계곡 1: 뚜쟁이와 유혹자 / 계곡 2: 아첨꾼

The Fraudulent

(Leopard)

19

계곡 3: 성직매매

20

계곡 4: 점쟁이

21-2

계곡 5: 부정부패

23

계곡 6: 위선자

24-5

계곡 7: 도둑

26-7

계곡 8: 교사자(the Evil Counselors)

28

계곡 9: 불화 유포

29-30

계곡 10: 거짓말쟁이

31

9

거인들(The Giants)

32

계곡 1: 친척 배반 / 계곡 2: 조국 배반

33

계곡 2: 조국 배반/ 계곡 3: 손님과 집주인 배반

34

자신의 상관 배반

위의 도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3마리의 짐승은 알레고리의 의미를 가지고 단순히 3가지 의미가 아니라, 3가지 의미가 가지치기를 하여 여러 가지 의미의 층위를 만들어내어 지옥의 계곡들을 다양한 부류의 죄인들로 채운다. 예를 들어 영어의 “incontinent”는 보통 무절제의 의미를 가지고, 정욕에 사로잡혀 절제하지 못하는 자, 음식을 절제하지 못하는 자, 자신의 재산을 절제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쌓아두거나 마구 써버리는 자, 자신의 성질을 절제(temperance)하지 못하고 화를 내거나 성질을 표현하지 못하고 내부로 끌어들이는 자, 그리고 자신의 신분을 망각하고 하나님에게 저항하였던 천사들, 이들 모두 절제하지 못한 자들이다. 이들 죄인들은 모두 무절제(incontinence)라는 어휘에 동의어로 묶여 있는 어휘목록들이다.

 

언어학자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가 처음 사용하였고, 후에 야콥슨(Roman Jakobson)이 시학으로 발전시킨 두 가지 용어들, “구문품성”(syntagma)어휘품성”(paradigm)이 있다. 구문품성이란 말이 시간 속에서 수평 이동하면서 이웃한 언어 단위들과 공존(co-presence)하며 상호관련성(correlation)이라는 그물망 속에서 병치(juxtaposition)의 질서를 유지하는 선형(linearity)의 구문 특성을 말한다. 그리고 어휘품성은 하나의 언어 단위가 수직적 연관성으로 유사성의 연상을 갖는 특성을 말한다. 이때 하나의 언어 단위는 많은 다른 언어 단위들과 대체적인 관계(substitutional relationship)를 형성한다. 야콥슨은 수사용어들(figurative terms)와 관련하여 구문품성을 환유성질(metonymic)과 동의어로, 그리고 어휘품성을 은유성질(Metaphoric)과 동의어로 설정하여 설명하였다.

 

사고(thought)와 언어행위(language performance)라는 두 가지 행위에서, 우리의 사고는 어휘품성(paradigm)과 관련이 있어서 시간과 관계없이 많은 어휘 망들을 구성하고 있다. 그리고 실천적인 측면에서 언어행위는 이들 어휘 망들을 구문품성이라는 언어의 실천으로 질서를 잡는다. 단테의 신곡지옥편에 나오는 3마리의 짐승 알레고리는 어휘품성으로 지옥의 구조를 세분화하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그들 어휘품성들이 중세의 사고와 맞물려 지옥의 이야기 틀이 되는 철학 그리고 종교와 정치의 담론으로 실천적인 구문품성을 갖추게 된다.

 

중세는 현세보다 내세가 훨씬 더 중요하고, 천국보다는 지옥이 더 가깝게 실감이 나는 시대였다. 그렇게 현재의 삶은 늘 영원한 내세와의 관계를 통하여서 의미를 가졌다. 중세의 작품들에서 알레고리라는 수사가 다른 수사보다 우세하였던 이유가 바로 중세 사람들의 사고와 매우 관련이 깊다.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의 의미를 찾았다. 문자의 의미 이외에 다른 의미를 생각하였다. 현재는 늘 미래와의 관련 속에서 의미를 지녔다. 현재의 삶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사람들은 현재를 해석해 줄 다른 의미를 생각했고, 현재의 지옥과 내세의 천국의 구별을 뚜렷이 나누려고 하였다. 더구나 중세의 인간들은 품위와 행동이 너무나 대조되는 삶을 살았다. 정치적인 권력을 가진 자나, 세속적인 부유함을 누리는 자, 아니면 종교적인 권위의 위치에 있는 자들 모두 품위와는 동떨어진 너무나 세속적인 악덕의 삶을 살았다. 일반 대중들이 보기에 그들의 삶에는 아름다움이 추함과 대조되었고, 지옥과 천국이 대조되고, 사랑과 증오가, 그리고 연민과 자비가 잔인함이 대조되어있었다. 대칭과 대조가 뚜렷한 시대를 살아가면서 중세 사람들은 질서를 추구하는 집착이 매우 강렬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열망 모두는 그들이 살아간 현세와 내세라는 이중적 잣대 때문이었다. 질서에 대한 강박적 집착으로 그들은, 르네상스시대의 원근법과 대조적으로, 많은 것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수용할 수 있는 체제를 꿈꾸었다. 그대서 그때는 총론(summa)의 제목이 붙은 책들이 많았다.

 

신곡은 이 세상 이야기가 아니다.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이야기이다. 인간은 자신의 삶을 자신의 자유의지에 의하여 자신이 선택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자신이 선택한 삶에 대하여 죽은 후에 하나님으로부터 정의(justice)의 심판을 받는다. 신곡에서는 지상에서 이해할 수 없었거나 불가능했던 모든 삶의 내용들이 모두 해석의 범위 안에 놓여있게 된다. 그 정의의 기준은 인간의 기준이 아니고, 하나님이 정한 영원함에 근거를 둔 기준이다. 신곡의 세상은 인간 세계가 아니다. 그곳은 하나님의 세계이다. 영원한 법이라는 정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도덕률이 적용되는 세계가 신곡이다. 이곳에서는 단테 역시 아무런 힘이 없다. 그는 의견도 없다. 단지 관객이고, 기록자일 뿐이다.

 

중세시대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영향으로 모든 것을 분류하는 습관이 있었다. 식물과 동물과 인간과 천사를 분류하였다. 식물은 생장의 본성을 지녔고, 동물은 생장과 감각의 본성을 지녔으며, 인간은 생장과 감각과 이성과 천사의 본성인 신성의 본성을 더 지녔다. 신곡의 지옥과 연옥에서 단테를 안내하는 버질은 인간 본성의 완성자로 이성의 화신이다. 버질(Virgil: 기원전 70-19)은 예수 탄생 이전에 태어나 죽은 사람이다. 그는 모든 판단의 기준을 이성에 근거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성은 동물과 인간을 구분하는 아주 중요한 잣대였다. 만일 인간이면서 이성을 사용하지 않았다면 그는 동물이다. 그래서 이성적이지 않은 행동을 한 사람은 동물로 비유하였다. 단테는 버질을 만나기 전에 3가지 동물을 만났다. 이들 3동물들은 모두 이성부재의 알레고리이다. 지옥에서 죄인들은 모두 동물과 같이 이성부재의 인간들이다. 그리고 지옥을 지키는 수문장들과 죄인들을 벌주는 피조물들 또한 모두 인간이 아니라 괴물들이다. 중세의 짐승의 알레고리들은 모두 이성부재의 알레고리들이다. 인간은 이성을 가졌기에 진실과 덕성을 사랑한다. 그리고 이성을 가진 인간은 고귀하다. 고귀함은 인간의 영혼 속에 있는 신성함의 씨앗이기 때문이다. 네 권으로 구성된 단테의 향연의 네 번째 권 모두가 이 고귀함에 대한 주제를 취급하고 있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 고귀함을 통해 인간은 신성에 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고귀함이란 비천하지 않음의 뜻이며, 비천함은 바로 동물의 동의어이다. 지옥의 죄인들은 모두 동물의 알레고리들이다. 그래서 지옥의 동물나라를 여행할 때 단테는 이성의 화신인 버질의 안내를 받는다.

 

단테의 향연47장은 동물 알레고리와 이성의 알레고리인 버질을 이해하는데 좋은 단서를 제공한다. -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의 이론24장에서 삶이란 생명이 존재하는 방식이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삶은 여러 방식으로 이루어진다.(생명의 존재 방식을 보면, 식물은 생장하고, 동물은 생장하고 느끼고 움직이고, 인간은 생장하고 느끼고 움직이고 생각하는 지성을 사용한다.) 피조물들은 자신의 존재방식의 가장 고귀한 부분으로 완성된다. 동물들(짐승들)은 삶을 느끼고, 인간은 살아가며 이성을 사용한다. 사람은 생명체의 존재 방식으로 이성을 사용하여야 사람이다. 인간이 이성에서 벗어나면, 그는 인간 존재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곧 인간의 죽음을 의미한다. 자기 인생의 목적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는 사람 또한 이성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 된다. 가야할 길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 또한 이성을 사용하지 않는 사람이다. 눈앞에 발자국이 있는데도 그것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이성을 사용하지 않는 사람이다. 솔로몬은 잠언523절에서, ‘가르침을 받지 않는 자는 죽은 사람으로, 수많은 어리석음으로 길을 잃을 것이다,’라 말했다. 가르침을 받지 않고, 스승을 따르지 않는 자는 사망할 것이다. 가장 천박한 자이어서 그런 짓을 한다.”

 

신곡을 읽으며 단지 줄거리를 이해하고, 죄를 구분하는 시적 구조를 분석하고, 아니면 유명한 에피소드들을 기억하는 것으로 독서를 다 했다 할 수 없다. 시의 행마다 뿜어 나오는 숨결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시의 처음부터 뿜어 나오는 거친 숨결은 검은 어둠에 둘러싸인 절망의 헐떡거림이다. 그 속에서 순례자인 주인공은 모든 말초신경을 곤두세워 극단의 경험을 하며 몇 번이나 정신을 잃고 실신한다. 신곡에서 단테가 사용하고 있는 단어들은 지극히 극단적이다. 더 이상 없을 끝까지 간 단어들이다. 그리고 많은 부분 지성의 옷을 벗은 살의 감각언어들이다. 그래서 우리가 읽어내야 할 것은 지적인 아우라(aura)가 아니라 감각적인 아우라이다. 산문과 달리 시의 독서는 감각 체험이 매우 중요하다. 시에는 요약하며 말하거나, 설명이 불가능한 감각 체험이 있다. 모두 다 이야기할 수 없는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감각의 시적 체험이 단테의 시 읽기에 매우 중요하다. 그 시적 체험조차 배우지 않고는 가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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