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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예술학 고전읽기
수업계획
대상텍스트 『유럽문명의 아버지 고선지 평전』 - 지배선저, 청아출판사, 2002
수업방식 (1) 강의 - 강좌의 의미와 대상 텍스트, 인물에 대한 소개
(2) 토론 - 수강생들이 직접 읽고 각자 읽은 가장 인상이 깊은 내용을 소개함. 이후 그 내용을 중심으로 토론을 진행.
(3) 총괄 - 몇 가지의 문제를 중심으로 텍스트의 내용과 소감을 정리
수업구성 (1) 수업의 의미와 텍스트에 대한 소개 : 2시간
(2) 준비한 내용 발표와 토론 : 2시간
(3) 발표의 정리와 내용의 총괄 : 2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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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연세인문학과 고구려 유민사를 읽는 의미

인문학은 인간의 삶에 대한 성찰의 학문입니다. 보다 나은 삶, 인간다운 삶을 위해 우리들의 지나온 삶, 현재의 삶을 곱씹고 들어가 봄으로써 새로운 지혜를 얻으려 하는 노력이 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렇다면 그것은 어떠한 방법으로 가능하게 만들 수 있을까요? 수많은 선현들의 통찰과 지혜로부터 실마리를 찾는 것이 제일 빠른 길이겠지요. 그러나 그와 더불어 우리들이 발을 딛고 있는 이 자리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이며, 우리의 삶과 정신이 어떤 과정을 거쳐 여기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이것이야말로 역사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지혜도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이곳, 이곳의 처지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확인할 때에 비로소 우리 현재와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는 통찰력을 찾을 수 때문입니다.

물론 그런 점을 염두에 두고 우리의 역사, 그 중에서도 지금 우리가 쉽게 찾을 수 있는 고선지 평전을 살펴보면 한 민족의 우수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최근 몇 십 년 만 놓고 보면 높은 경제성장과 풍요를 이뤘다고 하나, 우리의 고대 역사를 짚어보면 중국과 삼국(고구려·신라·백제)간의 갈등의 역사는 분명 비극의 역사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고대 조상들 가운데는 당으로 잡혀가서 세계사의 한 획을 장식한 인물들이 꽤 많습니다. 그 한 인물이 고구려 유민 출신 고선지 장군을 언급함으로서, 우리 역사의 새 지평을 열어 갈 수 있다고 봅니다. 그 이유는 비록 고구려가 당에 의해 멸망당하였지만, 그 당시 세계국가라는 당나라의 동서교섭사에서 고선지 장군의 이야기를 빼어 놓고는 작성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안타깝게도 거의 한 세기 전 고선지에 대한 연구가 서양은 물론이고 동양에서 활발하게 연구되었다는 사실이, 우리를 부끄럽게 만들고 있습니다.

요사이 말로 소통 또는 융합이라는 단어가 자주 언급되는 상황에서 고선지에 대한 조명은 매우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 이유는 당나라 현종 시대에 중앙아시아를 호령한 인물이 고선지였지만 그는 당에 의해 패망한 고구려 유민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런 고선지였기에 그는 심지어 자신의 부하로부터 멸시를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을 훈계하면서 용서하였던 그의 인품에 대한 것도 오늘날 우리에게 암시하는 바가 너무 큽니다. 그래서 때론 우리의 과거, 역사, 경험 속에서 과연 배울만한 것이 있는지,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분명 과거와 현재는 다르나, 역사에서 과거를 통하여 현재를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미래를 예지할 수 있는 통찰력을 볼 수 있기에, 역사학이 갖는 의미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중차대합니다.

고선지에 대한 연구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우리나라보다 주변국가에서 아니 서양에서 더 많이 연구되었던 그런 인물입니다. 고선지에 대해 동서양에서 주목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로 생각될 수 있지만, 그 중에 중앙아시아를 석권하면서 동서양의 교두보를 확보한 그런 인물로 평가하였기 때문에 모두들 그를 주목하였다고 봅니다. 한 예는 고구려 유민 고선지 장군이 당 현종의 밀명을 받고 세계의 지붕이라는 히말라야산맥을 넘어 연운보와 소발률국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는 사실입니다. 당 현종이 고선지 장군을 토번 공격 총사령관으로 임명한 이유는 고선지가 중앙아시아에서 그가 맡은 지역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주변의 세력들과의 전쟁에서 연전연승했기 때문입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사실은 당 현종이 고선지 장군의 사령관인 부몽영찰을 거치지 않고 비밀히 중사(中使) 변령성을 급파하여 토번 공격 총사령관으로 임명하는 칙서가 전달되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고선지는 토번 공격을 성공하여, 토번으로 들어가는 연운보는 물론이고 탄구령(해발 4,600m)을 넘었던 사실이 세계 역사가들이 고선지의 전공에 대해 환호 한 나머지 경이로움마저 표시 하였습니다.

연세대학교의 인문학의 전통은 식민지시기 연희전문 문과가 시작된 이래 바로 그런 고민에 발을 딛었다고 생각됩니다. 연세 인문학은 인류의 세계사적 진보와 보편적 가치를 앞장서서 받아들이면서도, 그것을 맹종하는 것이 아닌 우리 역사와 학문사상의 지반을 확인하는 가운데 주체적으로 수용하여, 고금과 동서의 지혜가 융합하는 우리의 길을 추구한 역사였습니다. 제국주의 근대의 폭력이 2차 세계대전으로 달려가고, 식민통치가 영원할 것처럼 생각되었던 1930년대 실학을 연구하고, 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되돌아보려고 했던 국학의 전통이 바로 연세대학교 인문학의 시작이었습니다. 또 그 되돌아봄을 자신의 역사와 문화를 특권 의식으로 귀결시키지 않고, 그 안에서 인류가 지향해야 될 보편적 가치에 대한 추구가 끊임이 없었습니다. 그런 연장선상에서 고선지에 대한 연구는 필자의 선생님이신 민 영규 박사께서 이미 1965고선지-파미르 서쪽에 찍힌 한국인의 발자국이란 글을 발표하셨던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 우리가 같이 읽고 얘기해 보려는 고선지 평전의 내용은 바로 그런 경험의 축척물입니다. 어쩌면 평온해 보이는 우리의 일상과 현실은 조금만 그 껍질을 들춰보면 많은 혼란과 불안한 미래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쉽게 해결되지 않을 것 같은 많은 정치, 사회적 문제들을 비롯하여 졸업 후의 진로, 취업, 사회생활과 같은 아주 구체적이며 직접적인 문제까지 많은 어려움들이 놓여 있습니다. 그것은 대부분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헤쳐 나가기 어려운, 사회와 국가가 같이 고민해야 할 문제들입니다. 그러나 그 국가와 사회의 노력이라는 것들 역시 그 구성원 각자, 각자의 문제를 직시하려는 노력, 어려움에 좌절하지 않고 지혜롭게 풀어나가려는 노력에 의존하여 새 길을 모색하여야 합니다. 그것을 할 수 있는 사람, 곧 책임감 있는 시민이 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지키고, 새롭게 가다듬은 긴 호흡을 하여 삶과 사회의 미래를 내다보는 통찰력이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기입니다.

우리는 힘들었던 우리의 역사 속에서 역설적으로 그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혹하고 힘든 삶 속에서 어떻게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고, 더불어 사는 것의 가치를 추구 하였는지, 때론 잊기도 하였지만 그 역사 속에서 꿈꾸어 온 고귀한 비전들은 어떤 것이었는지를 생각해 보는 것이야 말로 우리만이 가질 수 있는 유산들입니다. 시대에 따라 많은 것들이 변했다고 말하지만, 역사를 헤쳐 나가는 어떤 무한한 동력과 성찰 속에서 미래를 준비하는 지혜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런 고민을 품은 우리가, 앞으로 살펴볼 책이 세계사를 흔든 인물에 대한 고선지 평전입니다.

3. 고구려 유민 고선지에 대하여

고선지 장군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인물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고구려 유민가운데 고선지는 세계사에 기록될 정도로 유명한 인물이다. 많은 서양 역사서에 한국의 역사 인물 중 거의 유일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고선지에 대한 기록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지나쳐 버릴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고선지에 대해 우리가 모른다면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고선지의 외모는 수려하였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 용맹한 장군상이라고 말하기는 쉽지 않은 그런 인물입니다. 한국 사람들이 교육에 열성이었던 것과 같이 고선지의 아버지 고사계는 고선지가 어려서 행동이 굼떴기 때문에 걱정이 되어 고선지에게 무인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조련하였습니다. 물론 고선지의 아버지 고사계가 그걸 원해서 아들 고선지에게 무인으로 단련시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고구려가 멸망되었기 때문에 고구려 유민들 모두는 당에서 최하위신분인 노예였기 때문에 신분 상승의 유일한 탈출구인 당에서 군인의 길을 택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고선지의 아버지 고사계도 어쩔 수 없이 당에서 군인의 길을 걸었던 그런 인물입니다. 그런데 조선조의 몇몇 실학자들에 의해서는 고선지의 행적에 대한 언급 없이 다만 그의 이름만 기록하였다는 사실이 서글플 뿐입니다.

고선지가 동서교섭사에 커다란 흔적을 남긴 사실에 대하여 우리의 역사기록은 거의 전무하다고 말하는 것이 옳습니다. 조선시대 이전의 고려시대는 고선지의 이름을 기록한 사료를 찾을 길이 없습니다. 16세기 이후에야 지봉유설芝峯類說에서 흑치상지·왕사례·왕모중 등과 더불어 이름만 소개된 것이 최초기록입니다. 그 후 18세기 신당서』「고선지열전일부를 두 서너 줄로 소개한 한치윤의 해동역사가 있습니다. 한치윤과 동시대 인물 성해응의 연경재전집에서 고선지의 아버지 고사계와 더불어 고선지가 밀운군공에 봉해진 사실만 언급하였습니다. 19세기 이유원의 임하필기에서 신당서에 고선지 이름이 있다고만 언급할 정도로 그에 대한 기록은 한마디로 초라합니다.

그러나 고선지는 당의 사진교장(四鎭校將) 고사계의 아들로서 당의 안서사진절도사를 역임하였던 인물입니다. 그를 고구려인으로 보는 중국정사는 구당서,신당서자치통감등이 있습니다. 구당서, 신당서고선지전에서는 그를 분명히 고구려인이라고 기록하였다. 이런 까닭에 구당서자치통감은 안서절도사 부몽영찰이 고선지가 토번 연운보와 소발률국을 정벌한 전공을 시기하여 고선지를 가리켜󰡐개똥같은 고구려놈󰡑이라고까지 욕설을 퍼부은 사실을 기록하였습니다. 이는 부명영찰이 고선지는 당에 의해 멸망된 고구려인이라 인격 모독적 발언마저 주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경우야 어찌 되었든 고선지는 고구려 유민으로서 중앙아시아를 제패한 결과로 말미암아 세계사의 한 획을 그은 그런 위인입니다. 그러나 이런 질문도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는지요? 과연 고선지가 당이 아닌 고구려에서 출생하였다면 고구려에서 어떤 인물이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도대체 고구려가 멸망되지 않은 상태에서 고선지의 역할이 무엇이었을까? 고선지에게 고구려가 어떤 의미였을까? 평생 당의 장군으로 산 고선지가 조국 고구려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졌을까? 아니 그도 꿈이라는 것이 있었을까? 요약하자면 그도 사람으로서 그는 그의 아버지 고사계에게 어떤 모습으로 비쳐졌을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또 고선지는 당에 잡혀간 고구려 유민들과 달리 전략과 전술이 너무 출중한 인물이라서 고구려 유민들과의 관계가 어떠했을까 하는 질문을 던져보고 싶은 충동이 납니다.

연구자로서 고선지 평전은 고구려 유민의 한 사람으로 일생을 영위하기 위해 어떻게 몸부림치면 살았는가를 써내려간 해답서입니다. 고구려의 무인의 아들로 태어났을 고선지가 당에서 태어나서 어린 시절에 그의 행동이 굼떴던 그런 사람이 어떤 인물을 꿈꾸었는지 궁금한 대목이기도 합니다. 또 고선지는 당의 장수로로 모함도 받으면서 산 파란만장한 삶 가운데 그의 휘하에 거느린 고구려 유민들에 대한 생각이 어떠했는지를 알고 싶은 것도 한 부분입니다. 그가 고구려 유민으로서 이민족출신의 부하 장수들로부터 받은 모욕을 감내한 사실에서 그가 겪어야 했던 참담한 고통과 번민, 그리고 선택의 순간들은 어떠했는지, 매순간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와 좌절을 어떻게 극복했는지, 자주 닥치는 풍전등화와 같은 전쟁터에서 자신의 삶을 지켜내며, 삶의 마지막에서 그가 취한 행동이 자신의 생명을 연연해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적고 있습니다.

고구려 유민 고선지에 대한 기록들이 중국인에 의한 중국 정사에 왜 그 토록 자세한 기록을 남겼을까요? 물론 고선지가 당나라 시대에 그가 남긴 업적이 너무 대단하여 그에 대한 기록을 쓰지 않고는 중국정사가 제대로 작성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사실은 그런 고선지에 대한 기록이 우리 전근대사회의 기록에서 거의 그의 행적을 기록하지 않았던 사실에 미치면 더욱 서글픈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쩐 일일까요? 조국의 멸망은 고구려 유민 고선지만 뼈아프게 느낀 고통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고선지를 통해 중앙아시아 역사에서 우뚝 선 존재로 남아 있었는데도 고선지에 대한 기록을 조선조 실학자들조차 자세히 언급하지 못한 것은 대국을 의식한 역사인식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물론 조선조 실학자들에게 서양학문을 받아들이고 기록하였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지만 중앙아시아에서 고선지 역할에 관한 것을 생각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잠깐 고선지 열전을 설명하자면 중국 정사 구당서신당서에 자세하게 기록되어있을 뿐만 아니라 자치통감, 책부원구,통전, 대당육전,전당시,동당집, 산서통지, 당회요등 수많은 사료에서 고선지 행적을 언급하였습니다. 이는 고선지의 족적이 방대하여 위와 같은 사서들에서 그의 발자취가 기록되었던 것입니다. 물론 위의 책들은 전부 사료 집들입니다.

고선지에 대한 기록이 중국정사에서 열전의 형식을 갖추어 써졌던 사실은 고선지가 살았던 당나라 시대에 그가 이룬 업적이 중국에 미친 영향력이 컸다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런 사실을 뒷받침하는 것은 이미 1세기 전 서양 학자들이 앞 다투어 고선지에 관한 역사적 사실을 답사하며 연구하였던 사실에 이르면 더욱 확연하게 느껴집니다. 이런 고선지 장군의 위업으로 말미암아 중국에서 동서교섭사 상에 최고의 영향력을 끼친 인물로 후한시대 반초장군과 견주어 열거할 정도로 비중이 큽니다. 바꾸어 말하면 동서교섭사 상에 최대 영향력을 미친 인물이 고선지 장군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고선지 장군의 업적이 당을 위한 것 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으나 앞서 밝힌 것처럼 고선지 가족이 고구려 멸망으로 당으로 끌려가 벌어졌던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고구려 패망의 비극으로 말미암아 당에서 노예 신분에서 유일한 탈출구는 군인의 길을 걷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군인의 길을 택한 고선지 아버지 고사계가 그의 아들 고선지가 어려서 행동이 굼떴기 때문에 아들을 민첩한 군인으로 만들기 위해 조련시켰다는 내용은 ·구당서에 언급된 사실입니다. 만약 고선지가 아버지의 무인 교육을 감당할 수 없었다면 고선지는 동서교섭사상의 한 획을 긋는 인물로 기록 될 수는 없었겠지요. 아니면 평생을 당의 노예로 고선지가 살았다고 해석하더라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고선지 장군이 당에서 부귀영화를 누렸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물론 고선지에게 장안성안에 두 개의 저택을 가졌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저택은 고선지가 중앙아시아 전투에서 연전연승한 대가로 당황제가 하사하였던 저택입니다. 물론 고선지가 연전연승을 거둘 때마다 전리품을 당 황제에게 가져다받쳤으며 당 황제는 그 대가로 다시 상을 주었던 그런 시스템이라는 것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고선지는 당 황제로부터 받은 하사품을 자신이 갖지 않고 부하들에게 나누어 주었다는 사서의 기록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상황이야 어찌되었건 당의 관리조차 멸망한 고구려 유민이라는 사실로 고선지를 멸시했기 때문에 고선지는 이를 달래기 위해서 그가 받은 전리품을 모두 나누어 주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고선지의 행동으로 판단하면 고선지가 장군으로 출중하였기 때문에 고구려 유민이라는 이유하나만으로 고선지를 이유 없이 깎아내려 보려는 비열한 술수였습니다. 만약 고선지가 멸시 받아야 할 그런 인물이었다면 중국 사서에 고선지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판단되는 결정적 근거는 당에서 고선지를 모함하여 죽이려고 할 때, 그가 보인 장군으로서의 행동에서 당 황제나 관리들이 어느 정도 비열하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고선지가 당 황제의 근심거리였던 토번 연운보와 소발률국을 정벌한 후, 그는 서역을 총괄하는 총사령관 직책인 안서도호부에 임명되었습니다. 동서교섭사상에 엄청난 전공을 세우고 돌아온 고선지에 대한 시기심은, 직전까지 고선지 상관이었던 안서도호 부몽영찰도 자신의 위치가 고선지에게 넘어갈 것을 염려하여 고선지를 죽이려고 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고선지가 고구려 멸망으로 생긴 유민이었기 때문에 안서도호 부몽영찰마저 고선지를 멸시해도 좋다는 결과에서 생긴 사건이었습니다.

안서도호가 된 고선지의 부하들마저 고선지를 괴롭혔다는 사실도 사서에 자세하게 기록되었습니다. 나라를 잃은 자의 고통이 고선지의 삶을 지배한 결과라고 봅니다. 그러나 고선지가 이룬 위업에 대하여는 누구도 과소평가할 수 없습니다. 고선지의 위업이 너무 대단하여 서양학자들 가운데는 고선지를 서역 왕이었다고 서술한 인물이 있을 정도입니다. 아마도 이는 고선지를 평가하다보니 그의 업적이 너무 커서 서역 왕이라고 했던 것 같습니다. 물론 고선지가 서역에서 왕위에 올랐던 사실은 없습니다. 우리가 살피려고 한 인물이 바로 그렇게 대단한 고구려 유민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해방 후 모든 것이 불모지나 다름없는 우리나라가 7번째로 20-50국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이 한민족이 갖는 모험심과 출중한 판단력의 역사를 위로는 고선지로부터 찾아 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걸출한 인물이 고선지만이 아닙니다. 예를 들자면, 고구려 유민가운데 왕모중, 왕사례, 백제 유민으로는 흑치상지 등 무수히 많습니다.

고선지의 최후가 매우 비극적이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고선지는 멸시받는 고구려 유민이라서 그 당시 황제의 명령으로 안녹산의 난의 예봉을 막았는데도 불구하고 다른 죄목을 덮어 씌워 무조건 죽이기로 결정이 되었습니다. 물론 고선지 장군이 당에 의해 죽임을 당한 후 안녹산 반군이 장안을 점령하였습니다. 그런데 장안의 동쪽에 위치한 동관에서 안녹산 반군 공격을 막았던 그 곳에서 황제의 터무니없는 명령으로 고선지 장군은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혹자처럼 고선지가 그의 휘하의 군대를 가지고 반란을 일으켜 당을 멸망시킬 수 있는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그러한 일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선지를 평가절하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고선지가 패망한 고구려 유민으로 그동안 받은 수모를 생각했기 때문인지 고선지는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고 죽음을 초연하게 받아들였던 사실에 대해 말 많은 사람들은 고선지에 대해 비난을 퍼붓고 있습니다.

그런데 특기할 만 한 사실은 고선지가 죽음 직전에 부하들에게 한 연설은 어느 지휘관 못지않게 위대하였습니다. 다름 아니라 고선지는 자신이 자신의 부하들에게만 잘못이 있다고 말하면서 자신이 죄를 지었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내용은 안녹산의 반군을 막으면 고선지가 장군으로서 그 대가로 상을 주겠다는 약속을 내가 지키지 못한 것이 있다고 말하면서, 나는 도덕적으로 어떤 잘못도 없다고 한 연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고선지가 전리품을 착취하였다는 당나라의 사가들의 주장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주장이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사실입니다. 만약 고선지가 부귀영화에 몰두한 인물이었다면 위와 같은 내용을 부하들에게 최후연설을 하였을 리가 없을 뿐 아니라 그 자신 죽으려고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가 죽음을 받아들인 이유는 더 이상 모욕을 당하면서 당에서 살고 싶지 않은 고구려인의 기상대로 죽음을 택하였다고 봅니다.

고선지 평전을 쓴 이유는 한 민족에게 있어서 국가가 어느 정도로 소중한 것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쓴 것입니다. 국가가 없는 개인은 아무리 노력한다고 하더라도 끝에 가서는 어떤 영광도 누릴 수 없다는 사실을 역사에서 찾아보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책은 고구려 유민으로 아버지를 이어 군인의 길을 걸어 세계사에 빛난 족적을 남겼건만 고선지라는 인물의 고뇌는 끝이 없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었습니다. 그러나 고구려 유민으로서 고선지는 뛰어난 지혜와 지략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 민족이 어느 정도 출중한 민족인가를 설명하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혹자는 그런 고선지가 고구려 유민을 이끌고 당에 대항하지 못한 사실을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이와 같은 이야기는 패망한 고구려의 역사를 이해하지 못한 결과일 뿐 아니라 그 당시 당이 주변민족을 어떤 방법으로 철저하게 지배하였는지 모르는데서 야기되는 순진한 생각의 결과입니다.

한 가지 재미난 사실은 필자가 고선지루트를 답사하기 위해 중앙아시아를 답사했을 때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위구르족 출신 젊은 관광회사 사장이 자신이 고선지 장군에 대해 잘 알고 있는데 이와 관련해서 저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제의가 들어 왔습니다. 간단히 말해 그 때 그 사장은 저에게 질문하기를 고선지 장군에게 유감이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내용인 즉은 고선지장군도 당에 의해 멸망된 고구려 유민이고 위구르족도 같은 소수민족인데 위구르족과 손잡고 당을 멸망시켰으면 하는 이야기를 하더군요. 이는 마치 우리나라에서 고선지 장군이 당의 장군이라 우리가 주목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분들과 비교되는 질문이었습니다. 중국의 구당서를 보면 고선지 장군은 자신이 고구려 유민이라는 사실을 잊은 적이 없다는 사실은 우리민족이 2천년동안 나라가 없던 이스라엘 민족처럼 어떤 경우라도 고구려 민족이라는 사실을 잊은 적이 없다는 사실과 비교됩니다.

이 시간에 여러분과 함께 읽으려 하는 고선지 평전이 바로 그런 우리자신이 독특한 민족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는 사실입니다. 20세기 초부터 동양보다는 서양의 많은 학자들이 고선지 장군의 발자취를 추적하였다는 사실에서 왜 우리가 고선지의 행적을 자세히 알아야하는지에 대한 해답이 있다고 봅니다. 고선지의 아버지 고사계 일가는 고구려가 멸망하지 않았다면 고구려의 일원으로 고구려 발전에 무한한 족적을 남겼을 인물입니다. 더 나아가 고사계 일가에 대한 역사를 이해함으로 당이 왜 고구려를 멸망시키려고 그토록 오랜 세월을 노력했는지 그 해답이 나왔다고 봅니다. 고구려는 주변민족의 많은 침입을 막았을 뿐 아니라 그런 주변민족을 제압한 강력한 국가였습니다. 이런 이유로 수나라는 백여만의 대군을 동원하였는데도 고구려를 멸망시키기는커녕 도리어 멸망을 당하였습니다. 이런 중국인들의 열망이 당으로 이어지면서 당고조·태종·고종에 이르러서 고구려를 멸망시켰습니다. 그런데 고구려가 당에 의해 멸망되었다고 판단하기보다는 고구려 내의 자중지란에 의해 멸망되었다는 사실은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큰 경종을 울리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배워야할 교훈은 국가의 중요성입니다. 아무리 우수한 민족의 국가라 하더라고 국가가 없는 백성은 망망대해에 떠 있는 일엽편주에 불과합니다. 21세기에 고선지 장군에게 우리 민족이 나아갈 길을 물어 본다면,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 할 것입니다. 국가가 없는 민족은 치욕밖에 없다고 말할 것이 너무 자명합니다.

4. 읽을 내용

고선지 평전 전체를 읽어서 고선지 장군이 서양의 연구자들마저 주목한 이유가 무엇인지를 알아내야 합니다.

5. 생각해 볼 문제 (필요할 경우 활용. 학생들이 제기한 문제를 중심으로 수업을 진행할 예정)

1) 고선지는 왜 고구려가 아닌 당에서 삶을 시작하게 되었는가 하는 사실을 밝혀야하겠습니다. 당에 의한 고구려 멸망보다 왜 고구려가 당에 의해 멸망될 수밖에 없는 빌미를 만들었나를 확인 작업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2) 고선지는 태생적으로는 무인으로서의 자질을 갖추지 못하였습니다. 그런 고선지를 무인으로 세계사에 우뚝 설 수 있도록 만든 인물이 누구였을까요? 고선지의 교육을 담당한 인물과의 관계에서 오늘날 한국 사람과는 어떤 면에서 유사한지를 규명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입니다.

3) 당에 의해 패망한 고구려 유민 고선지가 서역을 호령하는 인물이 되는 과정에서 부하들의 멸시를 어떻게 극복하였는지를 살피야 할 것 같습니다. 이는 한민족이 세계라는 파도 속에서 슬기롭게 대처해 나가는 방법이 아닐까요?

4) 마지막 순간에 고선지는 자신의 야망보다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우선시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당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순간에도 자신의 부하들에게 약속한 사실을 지키지 못함에 대한 사죄를 구하였습니다. 이것이야말로 한민족이 추구하는 절대선이 아닐까합니다. 아마 서양학자들도 고선지 업적을 중요시한 것도 사실이나, 그의 부하를 사랑하는 마음에 감동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지요? 지금 우리 현실 속에서도 고선지가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위한, 그의 내면세계를 어떤 의미로 재해석할 수 있을까요?

참고자료 : 고선지 연보

출생 년 미상.

700년 전후 추정. 오늘날 베이징 부근서 고구려 유민 고사계의 아들로 태어남

720~744년 안서(오늘날 신장성 일대) 지역에서 유격장군으로 활동

744년 우전(타클라마칸사막 남쪽. 오늘날 호탄)진수사로 임명.

이때 토번을 진압하는 큰 공을 세움

745년 언기(오늘날 카라샤르)진수사로 임명 서역에서 장안으로 가는 비단길의

지배권 확보

747년 토번 연운보와 소발률국 잇따라 정벌하는 개가를 올림

74712월 안서절도사로 임명(서역의 실질적 지배)

750년 석국(오늘날 타슈켄트) 정벌(오늘날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751년 탈라스 전투에서 패배

755년 밀운군공 작위 받음. 안녹산의 난 발발

75512월 장안 동쪽 퉁관(潼關)에서 안녹산 반군 저지

75512월 황제의 명령을 어겼다는 터무니없는 죄목으로 처형당함

고선지 장군이 당에 의해 처형된 후 안녹산 반군은 장안까지 점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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